치유와 회복으로 자라는 교회

사진으로 보는 청주제일

청주읍성도(淸州邑城圖)
2025-06-28 13:48:38
김성회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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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청주읍성도(淸州邑城圖) - "청주진영"과 "망선루"는 청주읍성의 핵심적인 군사 및 문화 시설이었습니다.

1. 청주진영 (淸州鎭營) - 읍성의 심장, 군사 거점

 * 지도상 위치: 지도 하단 범례 ①번에서 "옛 청주진영 (현 예베당 위치)"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지도 본문에서도 '충청병영(忠淸兵營)'이라는 글자가 중앙에 가장 크게 쓰여 있는데, 이 '충청병영'이 바로 청주진영의 핵심이거나, 청주진영이 충청병영의 하위 부대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즉, 읍성 내부의 중심부, 현재의 청주 시내 중심가에 해당하는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기능과 역할:

   * 군사 지휘 본부: 청주진영은 청주 지역의 군사 행정을 총괄하고, 방어 및 치안을 담당하던 핵심 군사 기구였습니다. 병마절도사나 그 휘하의 책임자가 주둔하며, 지역의 병력을 지휘하고 훈련시켰습니다.

   * 충청도의 전략적 요충지: 청주는 충청도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이 컸으며, 청주진영은 이를 실제적으로 구현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유사시에는 병력의 집결 및 배치가 이루어지는 거점 역할을 했습니다.

   * 군사 시설 집적: 진영 주변에는 병사들의 숙소(군영), 무기고, 훈련장 등 다양한 군사 관련 시설들이 밀집해 있었을 것입니다. 지도에서 보이는 '충청병영' 주변의 여러 건물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 현재와의 연결: 범례에서 "현 예베당 위치"라고 한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군사 시설이 해체되고 그 자리에 다른 용도의 건물, 즉 교회나 예배당 같은 종교 시설이 들어섰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도시의 발전과 함께 기능과 건축물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현재 청주시 중앙공원 일대 또는 그 주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 망선루 (望仙樓) - 풍류와 감시의 누각

 * 지도상 위치: 지도 하단 범례 ④번에서 **"망선루 위치"**라고 명확히 표기되어 있습니다. 지도 본문 상단, 읍성 북서쪽 성벽 가까이에 '망선루'라는 명칭과 함께 높은 누각 형태의 건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읍성 서쪽의 미호천(미호강)과 인접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기능과 역할:

   * 조망 및 풍류: '망선(望仙)'이라는 이름처럼, 신선을 바라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주변 경치를 조망하며 시를 짓거나 학문을 논하는 등 선비들의 풍류 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미호강과 넓은 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경관이 뛰어난 곳에 세워졌을 것입니다.

   * 군사적 감시: 읍성 성벽에 인접해 있는 높은 누각이었으므로, 군사적인 감시탑 역할도 겸했을 것입니다. 성 밖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유사시에는 적의 접근을 감시하며 방어에 활용되었을 것입니다. 서쪽의 미호천은 청주읍성의 중요한 방어선이었으므로, 이를 감시하는 중요한 지점이었을 것입니다.

   * 상징성: 지역의 대표적인 누각으로서 청주를 방문하는 손님들을 접대하거나, 지역의 주요 행사 시 활용되는 상징적인 건물이기도 했습니다.

 * 현재와의 연결: 망선루는 현재 실물이 남아있지 않지만, 그 위치를 지도상에서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당시 청주읍성의 방어 체계와 문화적 공간 배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현재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일대, 특히 미호강과 가까운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청주진영과 망선루는 청주읍성이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강력한 군사 기능과 문화적 품격을 동시에 갖춘 도시였음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시설입니다. 이 두 시설의 위치와 기능을 명확히 파악함으로써, 조선시대 청주의 군사적 중요성과 더불어 당시 사람들의 삶과 문화까지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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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선루의 이전과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 및 교육기관 사용 관계

청주 망선루는 단순히 아름다운 누각을 넘어, 일제강점기 민족문화 수호 운동의 상징이자 근대 교육의 요람으로서 복잡다단한 역사를 지닌 건물입니다. 원래 지도에 표시된 읍성 북서쪽 성벽 인근에 있던 망선루가 헐려 1번 지역(현재 중앙공원)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1번 지역 부근의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 자리로 옮겨졌다가, 다시 현재 중앙공원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1. 망선루의 원래 위치와 철거:

 * 원래 위치: 망선루는 원래 청주읍성 내, 객사(客舍)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지도상으로는 읍성 북서쪽 부분, 서문(정주문)과 가까운 곳에 그려져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취경루(聚景樓)'라 불렸으며,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청주에 머물 당시 과거 시험을 치르고 합격자 방을 붙였던 유서 깊은 곳입니다.

 * 일제에 의한 철거 (1921년): 일제강점기, 일제는 청주읍성을 헐고 조선의 정기를 끊으려는 문화말살정책을 펼쳤습니다. 그 일환으로 1921년, 청주경찰서 내에 일본식 무술 훈련장인 '무덕전(武德殿)'을 신축하면서 망선루를 강제로 헐어버렸습니다. 500년 넘게 청주를 지켜온 망선루는 부재(部材)로 해체되어 서문동 골목에 방치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2.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로의 이전과 민족 운동:

 * 시민 모금 운동과 이전 (1923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방치된 망선루의 부재를 안타깝게 여긴 청주 지역의 민족운동가들, 특히 청주청년회 회장이었던 김태희 선생을 중심으로 청주읍교회(당시 청주제일교회) 신자들과 시민들이 힘을 합쳐 모금운동을 전개했습니다.

 * '최초의 시민운동': 이 모금운동은 일제강점기 청주 시민들이 일으킨 최초의 시민 주도 민족문화 보존 운동이자 자발적이고 합법적인 애국운동으로 평가됩니다.

 * 재건축 및 용도 변경: 시민들의 노력으로 모인 자금으로 망선루의 부재를 구입하여, 1923년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 부지 내, 남석교 언저리로 옮겨 다시 지었습니다. (지도상 1번 지역 즉, 현재 중앙공원보다 동남쪽으로 떨어진 육거리 시장 근처) 원래 개방형 누각이었던 망선루는 이때 1, 2층 사면을 벽돌로 막고 창문을 내며 내부를 칸막이하여 교실 공간으로 개조되었습니다. 이는 교육 시설로 활용하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 교회와의 연관성: 청주읍교회는 망선루 보존 운동의 주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전된 망선루가 교회의 교육관으로도 오랫동안 사용되는 등 깊은 연관성을 가졌습니다.

3. 교육기관으로서의 사용 관계:

청주읍교회 부지 내로 이전된 망선루는 이후 근대 교육의 산실 역할을 하며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민족 운동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 청남학교 (1924년~1938년): 망선루가 이전된 후, 청주 지역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청남학교'의 교사(校舍)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청남학교는 민족 교육 운동의 중심지로서 한글 강습, 각종 집회 및 강연장으로 활용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 기타 교육기관 및 단체: 청남학교 외에도 청주성경학원, 상당유치원, 야학 등의 교사로 사용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세광중학교, 세광고등학교, 청신고등공민학교의 교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YMCA, YWCA 회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북지부 등 여러 단체와 기관이 이곳을 활용하여 민족 운동과 사회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 근대 교육과 민족 운동의 요람: 이처럼 망선루는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시절, 우리 민족의 교육과 문화, 독립운동의 정신을 지키고 확산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4. 현재의 위치 (중앙공원):

 * 세월이 흘러 망선루 건물이 노후화되고 안전 문제가 불거지자, 학계와 시민단체에서 망선루의 보존과 복원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 2000년, 청주제일교회 측에서 망선루 건물을 청주시에 기증하였고, 시는 이를 해체하여 현재의 청주 중앙공원(지도상 1번 지역 부근)으로 옮겨 원형을 복원했습니다. 이로써 망선루는 청주시민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역사 유적지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요약:

망선루는 원래 읍성 북서쪽에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철거된 후 1923년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 부지 내, 남석교 언저리(지도상 1번 지역보다는 동남쪽에 위치)로 옮겨져 교육기관(청남학교, 세광고 등)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일제에 저항하는 청주 시민들의 민족운동의 일환이었으며, 망선루는 근대 교육과 민족정신 함양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이후 2000년에 현재의 중앙공원(1번 지역 부근)으로 다시 옮겨져 복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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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신앙과 역사의 교차로: 병영 관사와 천주교 순교지, 그리고 청주읍교회의 의미

우리가 보고 있는 청주읍성도(淸州邑城圖)는 조선 후기 청주의 심장부를 보여줍니다. 읍성 중앙에는 **충청병영(忠淸兵營)**이 위풍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단순한 군사 기지가 아니라, 지방 통치의 최고 기관인 병마절도사의 관아(동헌)가 있던 곳입니다. 이곳은 평상시에는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는 중심지였지만, 암울했던 19세기에는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1. 병영 관사(동헌)와 천주교 순교지:

조선 후기, 천주교는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전파되며 박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그리고 가장 큰 규모였던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했습니다.

청주 지역에서도 천주교 박해가 극심했으며, 특히 충청병영의 관아는 천주교 신자들을 심문하고 처형하던 잔혹한 순교지가 되었습니다. 당시 충청병마절도사였던 신명순(申命淳)은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탄압을 주도하며 수많은 신자들을 체포하고 고문했습니다.

이곳에서 순교한 대표적인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손자선(토마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청주 병영에서 순교했습니다. 그는 박해를 피해 충청도 연산으로 피신했으나, 고향인 청주로 다시 돌아와 잡혀 순교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한국 천주교 103위 성인 중 한 분으로 시성되었습니다.

 * 최형(베드로): 11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청주로 이주하여 살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청주 병영으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 끝에 옥사했습니다. 그의 순교는 어린 나이에도 굳건한 신앙을 지킨 사례로 기억됩니다.

 * 김경애(아가타), 이매임(테레사): 역시 1866년 병인박해 때 청주 병영에서 순교한 여성 신자들입니다. 특히 김경애는 교우들을 격려하다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순교했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충청병영 관사의 터에서 신앙을 증거하며 목숨을 바쳤습니다. 현재 충청병영 동헌 터는 청주 중앙공원으로 변모하여 평화로운 휴식 공간이 되었지만, 이곳은 동시에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피가 스며든 성스러운 장소이기도 합니다.

2.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의 위치와 역사적 의의:

청주읍성도는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의 위치를 직접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앞서 다룬 망선루의 역사를 통해 그 연관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위치적 연관성: 1923년 일제에 의해 철거된 망선루의 부재를 사들여 재건축한 곳이 바로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 부지였습니다. 당시 청주읍교회는 현재의 중앙공원 남동쪽, 육거리 시장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즉, 조선 시대 병영 관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교회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이는 역사적 공간의 연속성을 보여줍니다.

 * 민족운동의 거점: 청주읍교회는 단순한 종교 시설을 넘어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습니다.

   * 망선루 보존 운동 주도: 앞서 언급했듯이, 교회 교인들과 김태희 선생을 중심으로 망선루를 보존하고 교육 시설로 활용하려는 모금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이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한 저항이자 민족문화 수호의지를 보여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 근대 교육의 산실: 교회는 이전된 망선루를 청남학교 등 여러 근대 교육기관의 교사로 제공하며, 한글 교육과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습니다. 암울한 시기, 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 독립운동가 배출 및 지원: 교회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인사들이 모이는 장소였고, 예배와 교육을 통해 민족적 자각을 일깨웠습니다.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거나 지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 지역 사회 기여: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청주읍교회는 지역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교육, 의료, 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청주 지역의 근대화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결론:

청주읍성도 속 충청병영 관사의 터는 천주교 박해의 아픔이 서린 순교지입니다. 동시에 이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했던 청주읍교회는 일제강점기 민족 문화를 수호하고, 근대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민족 운동의 거점이었습니다.

청주라는 도시는 이처럼 종교적 순교의 역사, 민족적 저항의 역사, 그리고 근대 교육의 역사가 한데 얽혀 있는 복합적인 공간입니다.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는 단순히 종교적 건축물을 넘어, 이러한 청주의 아프고도 찬란한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중앙공원과 청주제일교회 일대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잊혀져서는 안 될 역사의 교훈을 전달하는 산 교육 현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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